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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

구미 금오산 폭포,도선굴 역사 알아보기

by 대등 2024.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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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도선굴 역사와 정의

 

일제강점기 동안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에 위치한 도선굴 암벽에는 두 곳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 남통동 도선굴 통로에는 두 가지 기문이 있는데, 하나는 '천석통로'라고 새겨진 도선굴 통로 왼쪽의 수직 암벽에 있는 암각문이고, 다른 하나는 '금오산 굴 통로기'라는 제목의 직사각형 판석에 새겨진 명문으로, 도선굴 내부에 돌출된 벽 위에 부착되어 있다. 저 역시 40여년 간 금오산을 방문했지만, 도선굴에 대한 자료가 부족해 아쉬웠다. 이제 여러 자료를 수집하여 기록을 살펴보기로 하자.

 

건립경위 및 도선굴의 역사기록 알아보기

도선굴 에서본 구미시내

 

금오산 굴은 금오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지만 절벽 중앙에 위치해 접근이 불가능했다. 이에 아쉬움을 느낀 구미면장 김승동은 1937년 봄, 금오산 중턱에 있는 도선굴로 가는 길을 만들기로 결심했고, 이에 주변 사람들 모두가 동의했다. 그 결과, 암벽을 깎아내고 쇠줄을 이용해 굴로 가는 길을 조성했으며, 이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도선굴 통로 기문과 금오산 굴 통로기를 새겨 넣었다.

 

도선굴은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에 있는 금오산 중턱, 해발 450미터 지점의 절벽에 자리 잡고 있다. 금오산도립공원의 매표소를 지나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면, 승려 도선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해운사에 도착한다. 해운사를 지나 5분 정도 오르면, 높이 28미터의 웅장한 대혜폭포가 물보라를 흩날리며 쏟아진다.

 

이 폭포를 왼쪽에 두고 오른쪽으로 길을 잡으면, 곧 도선굴로 통하는 절벽 아래에 도달한다. 도선굴로 가는 길목에는 도선굴 입구 암벽에 새겨진 기문이 있으며, 금오산 굴 통로 기는 도선굴 내부 오른쪽 벽의 상부에 판석으로 박혀 있다. 남통동의 도선굴 통로에는 자연 암벽에 새겨진 기문이 있으며, 이는 통로로부터 약 2미터 높이에 위치해 있다.

 

이 기문은 한자 해서체로 새겨져 있으며, 크기는 15에서 30센티미터 사이이다. 총 세 행에 걸쳐 열한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석통로(穿石通路: 돌을 깎아 길을 통하게 하다) 구미면장(龜尾面長) 김승동(金升東).” 금오산 굴 통로기는 도선굴 내부의 작은 동굴 입구 벽 위에 가로 70cm, 세로 48cm의 다듬은 판석에 해서체로 새겨져 있으며, 글자 수는 세로로 24행, 가로로 각 행 15자로 총 341자입니다.

 

금오산 굴 통로기는 구미면장 김승동이 지은 것으로, 제목은 '금오산 굴 통로기'이며, 내용에는 도선굴을 비롯한 뛰어난 자연 경관과 굴 통로를 만들게 된 동기 등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금오산은 선산의 진산으로, 군 남쪽 40리에 위치한다. 고려 말기에 야은 길재 선생이 절개를 지키며 이곳에 은거하였고, 그 이후로 산은 더욱 명성을 얻었다.

 

해서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대각국사는 이 산을 보고 '중국의 숭산과 닮았다'며 남숭산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산에는 아름다운 곳이 많으며, 특히 가는 폭포와 큰 폭포가 유명하다. 큰 폭포는 산 전체의 물이 모여 떨어져 자연스러운 못을 형성한다. 가는 폭포는 절벽에서 수백 척을 내려와, 비록 물줄기는 작지만 높이가 있어 떨어지는 물방울이 주변을 촉촉하게 한다.

 

금오산 명금폭포

 

큰 굴이 있어서 벽의 3분의 2 지점에서 볼 수는 있지만 오를 수 없어 항상 관광객들의 아쉬움이 되었다. 선산군지에 따르면, 승려 도선이 굴 안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그 뒤로 우리 선조인 욕담 선생도 굴에 피신하여 그곳에서 목욕을 하고 '욕담'이라는 이름을 자처했으며, 이끼 낀 벽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는데, 그 흔적은 오늘날까지도 선명하다.

 

일반적으로 당시에는 절벽을 어떻게 드나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정축년 봄에 저는 길을 개척하겠다고 제안했고, 많은 사람들이 동의했다. 그래서 측벽을 뚫고 쇠줄을 이용해 굴과 연결한 후 측량해보니, 높이가 21척, 넓이가 24척, 길이가 25척이나 되었다.

 

아직 기와 조각, 쇠그릇이 묻혀 남아 있어, 먼저 간 사람의 흔적이 분명하다. 산의 형상이 변한 것인지, 아니면 호사가 훼손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길이 열린 후로 시인이나 여행자의 발길이 이어져, 결국 한 풍경이 추가되었다. 모두가 "이 공로를 기록해야 한다"고 말하니, 나는 겸손하게 면장으로 있으면서 이 일을 주관했으므로, 이를 돌에 새겨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

 

면장 김승동이 기록하다. 현재 상태에 대해 보고합니다. 도선굴 통로의 기문은 수직 암벽에 음각되어 자연 풍화를 겪고 있지만, 아직 상태가 양호합니다.

 

금오산 굴 통로의 기문은 도선굴 내부의 높은 위치에 있어 접근이 어렵고, 오석으로 만들어져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연월일' 부분이 고의로 훼손되었으나, "昭和 十二年 四月日"(1937년 4월일)로 해석되어 1937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이 기문들은 비지정 문화재로, 도선굴과 함께 구미시 금오산도립공원 관리사무소에서 관리되고 있습니다.

 

결론으로 의의와 평가

 

금오산 도선굴은 신라 말기의 도선, 고려 시대의 대각국사, 조선 시대의 야은 길재 등이 찾아 은거했을 만큼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했으나, 적절한 등산로가 없어 접근하기 어려웠다. 구미면장의 노력으로 현재는 누구나 쉽게 금오산과 도선굴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도선굴로 통하는 길을 개척한 결과이다. 통로에 새겨진 기문은 이 길이 만들어진 배경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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